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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정보

#3. 타인의 고통 / 수전 손택

by 다정다감 꽃자리 2023. 11. 16.

타인의 고통 / 수전 손택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1. 작가 : 수전 손택(1933 ~ 2004)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으로 불린

미국의 에세이 작가이자 소설가이자 예술평론가. 정치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해박한 지식에 기반한 예술평론과 더불어 대량복제 이미지가 문화 감수성을 파괴하는 과정을 추적하며 세계 지성계의 관심을 받았다. 스스로는 ‘예술에 온 정신이 팔린 심미가’이자 ‘열렬한 실천가’로 불리길 원했다.

사회 현안에 관심을 두어 부조리를 고발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찾는 노력을 기울였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6년부터 행동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드러냈다.

“미국은 대량학살 위에 세워졌다” 같은 독설로 숨겨진 역사와 전쟁의 허위를 고발했다.

주류 대중매체로부터 ‘동시대 미국 문단의 악녀’로 불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펜클럽 회장 시절인 1988년에는 서울을 방문해 한국정부에 구속 문인의 석방을 촉구했다.

1993년에는 사라예보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올려 사라예보 내전을 전 세계에게 알렸다.

9.11테러로 인한 미국정부의 대(對)테러 전에도 날을 세웠다.

1966년 평론 모음집 ‘해석에 반대한다.를 발표하면서 이목을 끌었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다”라는 문제제기를 담아

서구 미학의 내용과 형식의 구별,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을 비판해 논란을 일으켰다.

‘사진에 관하여(1977)’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비평 부문과

‘미국에서(1999);로 ’전미도서상‘ 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는 사상의 자유 수호에 노력했다는 찬사를 받으며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받았다.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 목차 

2. 부록2_현실의 전투, 공허한 은유(Real Battles and Empty Metaphors)

3. 사진의 속성 : 사진은 자극적 매체, 이중의 메시지, 대상화

 

4. 인간의 본성 :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인간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

 

▷ “우리는 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화재 사건이나 충격적인 살인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를 늘 읽곤 하는가?”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 흔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이다. 특히 고통 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으로서, 기독교 예술은 지옥의 묘사를 통해서 수세기 동안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욕망을 모두 충족시켰다.(P64)

 

▷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 한다. 관음증적인 향락(그리고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거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그럴싸한 만족감)을 보건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p.150)

 

5.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

▷ (p150~154)

① 사진이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우리 눈앞에 가져온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들은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②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폭력의 이미지들이 자신들을 무감각하게 만들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이미지들을 보고 무엇인가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폭력을 외면할 수도 있다. 모든 이들이 잘 알고 있듯이 사람들은 영화, 텔레비전, 만화, 컴퓨터 게임 같은 대중문화 속에 나오는 폭력과 극단적인 잔혹함은 꽤 많이 받아들일 수 있다.

 

③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 따라서 정작 문제는 이렇다. 이제 막 샘솟는 감정으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알게 된 지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그런데 ‘우리’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면, 그리고 ‘그들’(그런데 ‘그들’은 또 누구인가?)이 할 수 있는 일도 전혀 없다고 느낀다면, 사람들은 금방 지루해하고 냉소적이 되며,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➃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수동성이다. 냉담한 것으로, 혹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무감각한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따지고 보면 감정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분노의 감정, 좌절의 감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여길 수 있는 감정일지라도 연민을 자아내기에는 너무 단순할 수도 있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 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과제

▷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